박신영 , 《 더 플라이어블 플랜 the pliable plan[1] 》 서문 : 기념 혹은 기억 김민관 계획 혹은 투시도 ― “plan” 의 어원을 따르자면 ― 는 미래를 위한 현재의 투사와도 같다 . 곧 불투명한 것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명확한 언어는 현실을 유연하게 편집해야 한다 . 이는 실패한 미래를 유예하며 현재에 새로움을 더한다 . 구부러질 수 있는 시간은 역설적으로 단단하게 고정된다 . 물론 ‘ 계획 ’ 은 공개되지 않을 것이므로 또는 원래 없었으므로 사후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론할 수 있다 . 곧 유연하게 계획은 편집될 수 있다 . 그렇다면 추적해야 하는 ( 반절 정도는 유연할 수밖에 없는 ) 계획은 어떻게 분별될 수 있을까 . 어떤 언어 혹은 이미지로써 이를 결박할 수 있을까 , 또는 비켜나갈 수 있을까 . 장소 , 장르 , 구상 , 구성 , 공간의 차원에서 이를 탐구해 본다면 … 하나 . 장소의 이미지 . 햇빛에 반짝이는 창 ― 투명한 장소 ― 가 함입하는 지팡이와 발걸음과 바퀴와 바람을 지나치며 다시금 반짝이는 어떤 사물 . 기억할 수 없는 , 기억으로서의 존재인 길고양이 등등 . 둘 . 장르에 대한 엉성한 고찰 . 도자는 장식일까 , 아니면 사물일까 . 어떤 극단적 물음 속에서 명확한 답변 대신 묘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 셋 . 구상에 대한 엉뚱한 가설 . 작가는 지나간 이미지를 붙드는가 , 아니면 도래할 이미지에 의존하는가 . 넷 . 구성에 대한 엉망진창의 발설 . 작업은 이미 검토된 물질을 재분별하는 일인가 , 아니면 없어질 사물을 애도하는 일인가 , 그것도 아니면 기념비적인 애칭을 만들어내는 일인가 . 다섯 . 공간에 대한 조금 더 정밀한 분석 . 평평한 긴장 . 평화로운 세계와 물질의 축복 사이에 놓인 공간에 머무르기 . 평이하고도 은근하고 조용한 어떤 장소에 대한 방문 , 그 방문을 유도하는 혹은 가능하게 하는 초청 , 역으로 그 초청을 완성하는 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