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유라 팝업전, 《그래서 우리는 선회하기로 했다》
갈유라 팝업전, 《그래서 우리는 선회하기로 했다》
일시: 2022.2.28(월)-3.6(일)
장소: 응접실(인천 중구 율목로30번길 1, 1층)
작가: 갈유라
공동 기획: 김민관, 갈유라
주최/주관: 오픽
디자인/설치: 갈유라
후원: 인천문화재단
예약: https://forms.gle/7xci1pJHP8SkeyyG9
시간과 물살은 흐르는 속성을 갖는다. 명확한 분기점을 지정할 수 없는 두 단어로부터 전후를 포괄하는 ‘선회’라는 개념은, 도착의 결과를, 회전의 방향을 명확하게 지정하지 않으며 선형적인 경로를 이탈한다. 과거에서 어정쩡 거리는 몸짓, 교착 상태의 우울, 구심력과 잔해의 시선은 선회의 부정적인 산물일까. 아카이브는 현재를 분절하며 과거로써 미래로의 다른 경로를 재구성하려는 충동에서 출발한다. 과거의 재조립은 현재의 시점 변경과 관련된다. 곧 현재의 좌표를 다시 쓰는 일이다. 아카이브는 해석의 시점을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거는 곧바로 현동화되지 않지만, 현재를 얄팍한 지층으로, 목적 없는 내달음으로, 반복하고 있는 과거의 유산으로 때때로 비춰낸다.
‘그래서 우리는 선회하기로 했다’는 ‘왜 너와 함께 나는 선회를 계획했는가’의 질문을 초래한다. 갈유라 작가의 팝업전 《그래서 우리는 선회하기로 했다》는 작가의 10년간의 작업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이는 10년이어서라기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의문에 부치기 위해서다. 또 다른 시작의 동력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동력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그 근거 자체를 의심해보기 위해서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기원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한 기원은 변환되어 연장되거나 변형되어 감소할 수도 있을까. 아카이브는 축적이 아니라 축적의 멈춤과 이전의 축적에 대한 구분 짓기를 유도한다. 갈유라 작가의 아카이브는 목격자가 아니라 해석자를 추동하려 한다. 이미 지난 시간이 어떻게 선회하는지를 지켜보려는 데서 우연히 생겨나는 언어는, 작가의 세계가 아닌, 각자의 세계와 연동되는 또 다른 언어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로소 현재로 도착하는 시점이 생겨난다.
작가는 관객을 은밀한 방으로 초대한다. 관객은 헤집어 놓은 자료를 검토할 수 있다. 스크리닝의 방식이 아닌, 클릭을 통한 점검의 시간을 허용한다. 아카이브로서 영상은 연표가 아닌 스크린상의 아이콘, 곧 이미지와 언어 들로 분쇄된다. 관람은 시간과 시간을 횡단하며, 이미지와 이미지를 중첩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관객은 수동적으로 주어진/비친 작업에 몸을 싣는 대신, 자기만의 방에서 자료들을 뒤적인다. 작품들을 주변으로 선회할 것이다. 관객은 일종의 리뷰어로서 작업과 작업을 잇는 일련의 글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리닝 옆에 놓인 작가의 노트와 활동, 메모 등은 작업을 해명하기보다 작업을 잠재적인 이미지로 되돌린다. 은밀한 방과 함께 은밀한 언어들 역시 꿈틀거린다. 이는 공개되지 않는, 작가 없는, 기록되지 않는 어떤 이름 모를 이들의 대화들을 통해서도 추동될 수 있을 것이다.
갈유라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어떤 질문이 있을 수 있을까. 작가의 작업을 연표 식으로 정리하면, 장소를 반영하거나 다양한 존재와 관계 맺는 행위로서의 즉각적인 퍼포먼스는, 점차 매체와 맺는 감각에 대한 질문과 함께 불투명도를 높인 이미지의 세계로 옮겨왔다고 보인다. 이러한 구분은 퍼포먼스와 이미지를 분리하는 한계를 노정한다. 매체, 감각, 관계, 장소, 환경 등을 다루는 각각의 작업은 그 주제에 절대적으로 갇히는 게 아니라, 그 보기의 방식과 함께 실험되어 오며 단순한 이미지의 지시가 아니라 관람자를 어떤 수용체로 둘지를 고민해 왔다고 한다면, 주제 그리고 매체는 교환되거나 혼합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매체와 존재의 상관적인 차원을 관람자로 연장하는 가운데 주제가 반영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각각의 현시점에서 존재의 토대를 바라보는 어떤 시도이지 않을까.
작가는 이미지 생산과 함께 이미지-설치의 방식을 고민해 왔다. 〈오토스포라1: 야곱의 사다리〉에서 클로즈업된 두 손의 안무와 그 뒤로 펼쳐진 녹차 밭처럼 신체들은 종종 스크린 너머를 관통하려는 듯 보인다. 퍼포머로부터 관람자의 시점이 인계되는 듯하다. 보기의 감각은 최근 〈원점〉의 이미지에서, 찰나적 인지와 환기를 통해 시험된다. 레디메이드 영상들이 자리하되 이미지-레터박스의 비율을 서서히 축소하는 변화를 통해 무감각한 이미지 관람 방식이 공간의 눈으로 환치된 이미지-기계와의 어떤 차이를 감각하는 게 작품의 어떤 초점이다. 〈오토스포라1: 야곱의 사다리〉가 스크린의 순수한 이미지로써 최대한 신체를 매개하려 했다면, 〈원점〉은 공간의 통로에 위치하며 이미지의 여닫음이라는 시간의 수축-확장 기제로써 신체 이동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 〈Bonus Room〉 역시 이미지를 보기 위한 이동 구간과 함께 상승한 구역에 있는 몸의 감각을 인지하게끔 했다면, 〈원점〉은 다른 작업 사이로 전시장을 매개하고, 전시에 스며들며 이미지와 배경의 경계 안에서 분별된다.
이러한 서술은 부차적이다. 다만 무엇을 볼 수 있음이 아니라 어떻게 볼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선회하는 시공간에서 원심력 역시 작용한다. 초점화는 다름 아닌 끊임없는 변경과 연동된다. 무엇을 명확히 볼 것인지가 아닌 어떻게 볼 것인가가 주요해진다. 이는 어떤 멈춤이 그 바깥으로의 통로를 낼지를 함께 감각하는, 보는 것에 대한 물음 자체를 생산하는 바다. 《그래서 우리는 선회하기로 했다》는 잠깐 멈추는 지점을 찾기 위한 어떤 시도이다. 이미지의 생산이 아니라 이미지를 생산하는 시간을 구성하기 위한 멈춤이다. 보는 자의 뒷모습이거나 텅 빈 모니터 화면이거나 전시장은 이미지를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람자는 이미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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